램프의 요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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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째째한 로맨스]
 
또다시 아침. 거의 잠을 설친듯하다. 아니, 잠은 항상 설친다. 잠들면 그 녀석을 볼까 두려운가 보다. 내가 또 무너질까 두려운가 보다. 계절이 한 바퀴 돌아갔지만 빠져나간 내 영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나 보다. 의미 없이 틀어 놓은 TV처럼 공허하다. 끄지 않은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K 의류 공장 여직원이 공장의 압박에 못 이겨 분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회사에서 벌어진 일련의 '압박'에 관련된 부분들을 수사 중이라고 한다. 공장은 그 여직원에게 결국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는 '압박'을 했을 것이고 그 여직원은 그러한 요구에 가장 화려하고 역설적인 방법으로 따랐을 것이다. 어떠했을까? 해방된 영혼은 육신의 고통을 지웠을까? 그녀의 해방은 다른 노동자들의 해방 역시 이끌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압박과 억압에 의해 결국 묻혀버릴까?
 
가슴이 다시 가라앉기 시작할 때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주전자가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난 미리 준비해둔 찻잔에 물을 부어 넣었다. 순간 다즐링 홍차의 향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차가운 물이 담긴 냄비 속에서 삶은 달걀을 꺼낸다. 출근하는 날의 아침 식사는 체형관리를 빙자한 소식을 한다.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는 시간을 식사 조리라는 명목으로 뺏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크지만. 정 배가 고프면 학교 매점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 먹으면 된다.
 
차가 우러나는 사이 삶아 놓은 달걀을 까기 시작했다. 단단한 겉껍질과 속껍질을 벗겨 내리면 매끄럽고 촉촉하게 젖어있는 아직 따스한 속살이 드러난다. 속살이 더 식기 전에 내 입으로 가져가 빨아들인다. 혀에 닿는 감촉을 이빨로 부수면서 목구멍으로 넘겨 허기를 채운다. 알맞게 식은 차를 마신다. 아니, 들이킨다. 그리고 서둘러 출근할 준비를 한다. 급히 뜨거운 물로 샤워하며 아프리카산 쉐이빙크림을 수염에 발라 면도하고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구호를 내건 치약을 듬뿍 묻혀서 이를 닦고 향이 진한 샴푸로 머리를 감고 또 향이 더 진한 바디 워시로 몸을 씻었다.
 
골반과 엉덩이에 달라붙는 얇은 삼각팬티를 입고 파스텔 톤의 회색 셔츠를 입고 치노 팬츠를 입는다. 포마드를 발라 머리를 단정하게 옆으로 넘기고 로션을 얼굴에 바른 뒤 호박과 계피 향이 섞인 향수를 가볍게 뿌린다. 그리고는 얇은 재킷을 걸치고 로퍼를 신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바깥 공기를 크게 들이마신다. 허전한 가슴 속을 채우듯.
 
언제나 그렇듯 아침 시간의 버스는 등교하는 학생들로 만원이다. 나는 학생들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할 정도로 부지런한 편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수업 시작하기 10분 전에 도착할 만큼 게으르지도 않았다. 게다 아끼던 애마인 가와사키 닌자를 종서에게 급히 돈을 빌려주느라 그가 죽기 전 팔았다. 그러다 보니 여고 선생이 된 이후 버스로 출근하게 된 지 이제 1년 남짓. 짧은 시간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몸에 붙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직 버스 시간을 잘 모르는 나는 떠나기 바로 직전의 버스에 몸을 날려 겨우 올라탔다. 버스카드를 찍고 두 걸음 들어가자 버스는 늦었는지 급 출발했고 관성의 급격한 쏠림에 사람들은 버스 안쪽으로 밀렸다. 그리고 내 등 뒤로 누군가가 부딪혔다. 쿵.
 
“어머. 죄송합니다.”
 
앳된 목소리였다. 나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아...... 3반의 서아란 학생?”
 
“어? 제 이름 기억하시네요? 헤헤.”
 
수업 들어가는 반의 학생이다. 담임을 맡은 반이 없는 나는 수업 들어가는 반의 반장이나 부반장 정도는 이름을 외웠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러한 직책이 없는 아이지만 이유 없이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보면 그 아이의 밝은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무엇이 그녀를 밝게 만드는지 좀 더 세밀히 보게 되었다. 윤기가 흐르는 긴 생머리를 어깨를 기준으로 앞뒤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깨끗한 피부에 유난히 활기가 서려 있는 얼굴은 그 속 안으로부터 빛이 나는 느낌이었다. 특히 대부분 웃는 입 모양과 눈매는 나로 하여금 기분이 좋아지게 하면서 이유 없이 편안하고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였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더욱 선명히 내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고 다시는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나는 말했다.
 
“그럼 기억하지요. 내 수업 잘 들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잘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참, 선생님께서는 예전에 오토바이로 출근하지 않으셨어요? 가와사키 닌자.”
 
그녀가 마지막에 말한 닌자라는 소리에 속으로 살짝 놀랐다. 내가 말을 이었다.
 
“어? 잘 알고 있네요? 오토바이 이름까지......?”
 
“선생님 유명했거든요. 선생님 중에서 오토바이로 출근하는 사람이 선생님 말고 누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오토바이 이름도 알게 되었어요. 우리 오빠도 오토바이를 좋아해서 원래 알고 있었던 것도 있고요.”
 
“아아, 그렇군요. 이제는 안 탄지 좀 되어서......”
 
“왜 안 타요?”
 
당연하지만 당돌한 질문에 멈칫했다. 그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사라졌다. 어색하지 않게 말을 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팔았어요.”
 
“아아...... 그렇구나.”
 
그녀의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숨 쉬는 것만이 겨우 허락된 좁은 만원 버스 안에서 나에게 밀착된 그녀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내 등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고개를 다시 돌려 버스 안쪽의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드디어 학교 앞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었고 모두가 터지듯 버스 밖으로 퉁겨져 나왔다. 버스 밖으로 나온 후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는데 그녀가 앞으로 와서 말했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이따 수업 때 봬요. 선생님.”
 
“아, 그래요. 어서 가요.”
 
그녀가 그리 말하자 오후에 3반 수업이 있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바람에 살짝 살랑거리는 긴 생머리로 시작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동안 쳐다보다 학교 쪽으로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동아리방이 있는 학생회관으로 가는 길은 살짝 경사진 언덕길이다. 그 길을 걸어 올라가면 5층짜리 학생회관 건물이 나오고 정문으로 들어가서 두 층을 더 올라가면 여러 동아리방이 줄지어 있는 층이 나온다. 문학 동아리에 속한 나는 복도 오른쪽 구석에 있는 609호실로 발걸음을 향한다.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종서 혼자 동아리방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방해하기 싫어서 조용히 의자에 앉으니 되레 기척을 느끼고 그가 인사를 건넨다.
 
“왔어?”
 
“응. 밥 먹었어?”
 
“아직.”
 
“뭐 하고 있어?”
 
“잠만”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그는 다시 집중하며 그리던 것을 마저 그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그를 지긋이 바라본다. 그의 긴 앞머리는 앞으로 내려와 한쪽 눈을 가리고 있었고 머리카락 사이로 솟아 나와 있는 귀는 미묘하지만 특이한 개성을 그에게 부여하며 인공적으로 흉내 내기 어려운 곡선을 그리며 다시 머리카락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의 뒷머리는 길게 어깨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트리트먼트를 정성스럽게 하는지 윤기가 났고 정갈하게 하나로 묶여 있었다. 마치 검은색 고양이 꼬리처럼. 그는 예전에 긴 머리에 대한 로망이 있다고 하면서 한창 기르고 있는 중이라는 설명을 해준 적이 있었다.
 
검은 머리 밑으로 드러난 그의 목은 아쉽지 않은 길이의 선을 그리며 쇄골로 이어졌고 반팔 티셔츠 속으로 숨어들어간 선은 다시 어깨 밑에서부터 나와 근육과 조금의 지방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남성적이지만 부드러운 선을 이어나갔다. 앞 팔의 양쪽으로 갈라진 근육의 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면 잘록하지만 약하지 않아 보이는 손목이 나타났고 이어지는 손과 남자치고 길고 가는 손가락들이 펜을 잡고 간결하지만 단호하고 연속적으로 종이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 사람치고 유난히 오뚝한 그의 콧날과 비뚤어지지 않은 코 선은 그의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해주고 있었고 짙고 선명한 눈썹 아래 집중하고 있는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종이와 펜을 보고 있었고 정돈된 호흡은 규칙적인 배와 가슴의 움직임에 따라 교차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 얕게 들숨과 날숨이 반복적으로 교차되고 있어 마치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지만, 유심히 보면 그의 회색 옥스퍼드 셔츠의 횡경막 부근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또 그의 배 역시 같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람한 체격은 절대로 아니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탄탄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맨몸일 때 어떤 몸을 보여줄지 가볍게 그려보기도 했다. 의외로 셔츠가 얇은 것인지 한쪽 유두가 아주 살짝 비친. 아주 살짝.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자세에서 셔츠 위로 살짝이라도 유두가 보인다는 것은 아마 그의 유두가 작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해주었다.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나 역시 집중력이 높아지며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아니, 호흡이 가지런해지는 것이 아니라 되려 그와 반대로 호흡이 조금씩 세지는 것 같아 들키지 않게 일부로 호흡을 억제하게 되었다. 그가 무엇을 그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은 채 그의 모습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관찰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가 입을 열어 굵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욱.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이고, 미안.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을 줄 몰랐네.”
 
“아니야 괜찮아. 그냥 구경하고 있었어.”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갈까?”
 
“그래, 그러자. 학식?”
 
“에이... 질리고 맛없어.”
 
“그럼 뭐 시켜 먹을까?”
 
“음......중국집?”
 
“그래. 그거 먹자. 어디 걸로 시킬까?”
 
“금문도?”
 
“거기?”
 
“응. 빨라. 그리고 지금 이벤트도 해.”
 
“무슨 이벤트?”
 
“그...... 뭐였더라....... 아, 짬짜면이나 짬볶밥 두 개 시키면 군만두 서비스.”
 
“군만두는 원래 주는 거 아니야?”
 
“몰라. 이벤트래. 아무튼, 공강 시간 얼마 안 남아서 빨리 오는 게 나아.”
 
“그래, 그럼 그걸로 먹자. 난 짬짜.”
 
“그럼 주문한다.”
 
 핸드폰을 들고 동아리 방 냉장고에 붙어 있는 전단지 중에 금문도를 찾아 전화번호를 누르고 음식을 주문한다.
 
“금문도죠? 여기 학생회관 609호인데요, 짬짜면 하나랑 짬볶밥 하나 주세요. 군만두 주시죠? 예, 알겠습니다. 빨리 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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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의 요정 8 (마지막)  
1 Comments
하히하리오 2020.12.30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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